헤모글로빈의 분자 구조를 밝혀 1962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영국 생화학자 맥스 퍼루츠(Max Ferdinand Perutz (1914 – 2002))는 엉뚱한 제목의 과학 에세이집을 출간했다.
‘I wish I’d made you angry earlier. 진작 화나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제목의 기원은 70여 년 전 어느 토요일 아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구에 진척이 없어 좌절하던 퍼루츠는 새로 발표된 논문을 읽다 큰 충격을 받았다. 경쟁 연구자들이 자신이 고민하던 연구 문제에 관한 논문을 먼저 발표했기 때문이다. 퍼루츠는 이를 어떻게 만회할지 머리를 싸매고 분노의 주말을 보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이 되자마자 당시 소속 연구소의 상사이자 저명한 물리학자인 로런스 브래그의 사무실로 쳐들어가 엄청난 연구 아이디어를 쏟아 놓는다.
브래그가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는지 묻자 퍼루츠는 “경쟁 연구자들이 제안한 아이디어를 먼저 생각해 내지 못한 분노에서 시작됐다”고 답한다. 그때 브래그가 한 말이 “진작 화나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였고, 그렇게 책 제목이 됐다.
때때로 분노는 성취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분노의 이면에는 동기를 부여하고 에너지를 샘솟게 하는 긍정적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는 종종 도덕과 용기의 무기가 된다”고도 했다.
이처럼 분노는 우리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에도 종종 ‘나쁜 감정’으로 치부된다. 분노 표출이 너무 과하거나 모자라서 문제인 분노조절장애(간헐적 폭발장애)나 화병같이 극단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탓이다.
분노는 원래 생존에 필수적인 감정이다. 화가 난다는 것은 뭔가가 나의 물리적, 사회적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는 신호다. 그래서 화가 나면 그 대상을 ‘제거’해 버리고 싶은 동기가 강하게 일어난다.
화난 퍼루츠가 경쟁 연구자들을 제거하는 방법은 더 큰 연구 성과를 내는 것이었다. 목표물을 제거하려면 고도의 집중력과 빠른 두뇌 회전, 신속한 움직임이 필수다.
놀랍게도 화가 나면 진짜로 우리 몸은 이렇게 반응한다.
미국 텍사스A&M대 심리학 및 뇌과학과 교수 연구팀은 "어떤 감정 상태일 때" 일의 능률이 올라가는지 실험해 봤다.
실험 참가자 233명을 모아 이들을 5그룹으로 나눴다. 4그룹에는 분노, 즐거움, 슬픔, 욕망(식욕) 등 그룹별로 특정한 감정을 유발하는 사진 15장을 각 5초씩 보여줬다. 분노 그룹에는 아동학대 사진을, 욕망 그룹에는 맛있는 케이크 사진 등을 보여주는 식이다. 1개 그룹은 별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했다.
사진을 보여준 뒤 상당히 어려운 언어 지능 테스트를 했다. 그 결과 분노 그룹의 성적이 가장 좋았다. 평온한 상태에서 문제를 잘 풀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 그룹은 이들보다 점수가 40% 정도 높았다. 또 이들은 어려운 문제를 끝까지 풀어 보려는 끈기도 강했다. 소매 걷어붙이고 성공할 때까지 집요하게 도전하는 힘이 불끈 생겨나서다.
테스트 종류가 달라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화난 참가자들은 집중력과 빠른 반응 속도를 요구하는 다른 테스트에서도 남들보다 성적이 좋았다.
다만 풀기 쉬운 문제에서는 그룹별 성적 차이가 없었다. 연구진은 “쉬운 목표보다 어려운 목표를 달성해야 할 때 분노가 동력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화가 나면 창의성도 번뜩인다. 화가 나서 교감신경계가 작동해 혈압과 심박수가 증가하고, 동공이 확장되면 인지도 활성화된다. 신체와 정신이 모두 각성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때 잘 정제되고 차분한 사고보다는 광범위하고 틀에 박히지 않은 사고가 더 잘된다. 평소보다 사고의 폭이 넓어지면서 창의성이 발휘될 수 있다.
하지만 화가 날 땐 '악한 창의성(malevolent creativity)'도 번뜩이는 게 문제다. 분노라는 감정은 마치 ‘양날의 검’과 같다. 화와 공격성은 매우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화난 사람들은 더 잔인하고 독창적인 복수 방법을 생각해 낸다.
하오닝 중국 화둥사범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 102명을 모집해 이런 검사 문항을 토대로 어떤 감정 상태에 있을 때 악한 창의성이 더 뛰어난지 알아봤다.
여기서는 참가자들을 분노, 슬픔, 평온한 감정 상태의 3그룹으로 나눴다. 분노와 슬픔을 유발하기 위해 살면서 겪었던 화나는 일과 슬픈 일을 5분간 자세히 떠올리라고 했다. 그런 뒤 일반적인 창의성 테스트 문제와 악한 창의성 테스트 문제를 각각 풀게 했다.
그 결과 분노 그룹은 일반 창의성 문제는 물론이고, 악한 창의성 문제도 다른 그룹보다 더 잘 풀었다. 다른 감정 상태에 있는 이들보다 다양하고 기발한 복수 방법을 잘 생각해 냈다. 연구진은 “화가 나면 감정적으로 각성돼 공격성이 생겨나고, 이는 악한 창의성을 자극할 수 있다”고 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순간 분별력을 상실한 분노 표출은 상대에게 상처를 줄 뿐 아니라 사후에 감당해야 할 몫도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노가 목표 달성을 위한 에너지가 되기보다 남을 해치는 공격성으로 나타날 때 쓸 수 있는 감정 조절 방법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학계에서는 쉽고 빠른 분노 해결 방법을 알아내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 나고야대 연구진은 실험에 참가한 대학생 57명에게 다소 혹독한 실험을 했다. 이들에게 ‘공공장소 흡연’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한 의견을 글로 쓰게 하고, 일부러 굴욕스러운 평가 결과를 알려줬다. 논리성, 흥미도 등 여러 항목에서 각 2∼4점(9점 만점)의 박한 점수를 줬다. 그리고 평가 멘트에 ‘교육을 받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좀 배웠으면 좋겠다’고 썼다. 참가자 모두가 같은 평가를 받았다. 평가 결과를 받기 전후로 감정 상태를 측정했더니, 평가지를 받은 후에 분노 지수가 급격히 상승했다.
이 실험의 목적은 그 다음 순서에 있었다. 학생들에게 왜 이런 평가를 받았는지 나름의 이유를 분석해 종이에 쓰도록 했다. 또 현재 기분과 그 원인을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쓰라고 했다.
그리고 참가자 절반에게는 종이를 책상 위에 있는 투명한 플라스틱 통에 보관하라고 시켰다. 나머지 반에게는 종이를 공처럼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지라고 했다.
이 과정을 마치고 다시 분노 수준을 측정했더니, 놀랍게도 종이를 쓰레기통에 던진 사람들은 처음 평온했던 수준으로 돌아왔다. 반면 종이를 통에 보관한 학생들은 계속 화가 나 있었다.
연구진은 실험 대상자를 다시 모집해 같은 실험을 반복했다. 이번에는 종이를 쓰레기통에 던지는 대신 파쇄기에 갈도록 했다.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쓰레기통에 던지든, 파쇄기에 갈든 일단 종이를 없애는 행위가 중요했다.
이 실험은 애지중지하는 물건을 못 버리는 심리를 역이용한 것이다. 물건에 서려 있는 나의 좋은 감정, 추억이 버려지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잡동사니를 끼고 사는 경우가 많다. 이를 반대로 이용하면 나쁜 감정이 담긴 물건을 버리거나 파괴할 때 그 안에 담긴 감정까지 없애버리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연구진은 특히 이 방법을 부모들에게 추천했다. 집에서 배우자와 싸우거나 아이들에게 화를 내지 말고 종이에 쓰고 버리는 간단한 방법으로 감정을 다스려 보라는 의미에서다. 물론 직장에서도 사용해 볼 수 있다.
다만, 욕설 등 분노에 활활 타오르는 격정적인 언어를 쓰면 오히려 화를 돋울 수 있으니 주의하자. 최대한 객관적으로 써야 화가 식는 효과가 더해진다.
‘분노는 어떻게 삶의 에너지가 되는가’의 저자 황미구 광운대 교육학과 겸임교수는 “화날 때 운동, 명상, 심호흡, 감정 일기 쓰기 등 추천되는 모든 방법들은 이미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이라며 “이 가운데 경험적으로 나와 맞는 방법은 무엇인지 찾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양날의 검’ 분노는 감정을 각성시켜, 머리회전이 빨라지고 집중력이 높아져 창의성을 상승시킨다는 긍정적 성취 동력이 될 수 있다. 단, 공격성을 자극하여 결국 자신을 파괴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도록 나만의 감정 해소 방법 찾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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